무능의 극치 [국정일보 문이주 기자]

문이주 기자

작성 2020.06.09 09:27 수정 2020.06.16 10:06

[문이주 기자] 모든 위기는 기회를 수반한다. 임진왜란은 큰 고통이었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했다. 백성들은 특권만 있고 의무는 없는사대부 지배체제에 파산선고를 내렸다.


그러나 선조 26(1593) 10월 영의정으로 복귀한 류성룡이 노비들도 군공을 세우면 벼슬을 주는 면천법, 토지 소유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세금을 납부하는 작미법, 양반도 노비들과 함께 군역에 편입시킨 속오군제도 같은 개혁입법을 강행하면서 회생의 전기가 마련되었다.

선조도 국망이 목전에 다가왔던 임란 초기에는 개혁입법들을 지지했다. 그러나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선조의 생각은 달라져 전쟁영웅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 희생양이 육전 영웅 김덕령 이었다. 조선왕조 타도를 기치로 봉기한 이몽학과 연루한 혐의를 받았으나 김덕령이 가담했다는 이몽학의 일방적이 선전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5,000명 의병을 거느렸던 김덕령은 선조 29(1596) 8월 여섯 차례의 혹독한 형장을 당하고 세상을 떠났다. [선조수정실록] 2981일조는 소문을 들은 남도의 시민들은 원통히 여긴다면서 이때부터 남쪽 사민(士民)들은 김덕령의 일을 경계하여 용력있는 자는 모두 숨어 버리고 다시는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다라고 적혀 있다.

육전의 영웅 김덕령 죽이기는 수전 영웅 이순신 제거 작전과 동시에 진행 되었다.

이순신을 남인 류성룡이 천거한 것을 부정적으로 보던 좌의정 김응남, 해평부원군 윤근수 등의 서인은 선조가 이순신을 비난한 것에 적극 동조했다.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북으로 도망간 선조가 요동 망명을 포기한 것은 일본군과 싸우기로 생각을 고쳤기 때문이 아니다.

[선조실록] 25626일조의 명나라에서 내부를 청한 자문을 보고 본국(선조)을 관진보의 빈 관아에 두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의주에 오래 머물 계획을 세웠다는 기록처럼 명나라에서 선조가 압록강을 건널 경우 요동의 빈 관아에 유패하러 했기 때문이었다.

요동에서 비빈을 거느리며 제후 행세를 하려던 계획이 틀어지자 선조는 망명을 포기했던 것이다.

이순신 제거 작전이 진행되는 가운데 조선 남부 일대를 점령한 일본과 명나라 사이의 강화협상이 전개되었다.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명나라 사신 이종성에게 조선 남부 4도를 떼어달라는 할지(割地)’와 명나라 공주를 후비로 달라는 납녀(納女)’ 등을 요구해 협상은 결렬되었다.

도요토미는 선조 30(1597) 정월 다시 대군을 보내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정유재란의 승패가 이순신 제거에 달렸다고 판단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가자 요시라에게 가토가 어느 날 바다를 건널 것이라는 역정보를 조선에 제공했다.

유인책으로 간주한 이순신은 움직이지 않자, 선조와 서인들은 이순신 제거의 기회로 삼았다. 무신이 조정을 가볍게 여기는 습성은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면서 이순신을 압송하게 하고 원균에게 삼도수군통제사를 대신하게 했다.

이순신에게 역적죄, 국가반역죄, 원균을 함정에 빠뜨린 많은 죄가 있으니 마땅히 율()에 따라 죽어야 한다고 단언했다.

27일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던 이순신은 류성룡과 정탁 등의 구원으로 겨우 목숨을 건지고 백의종군에 처해졌다.

원균은 이순신을 대신하여 선조 306월과 7월에 한산도와 칠천도 해협에서 거듭 대패해 조선 수군은 궤멸되었고 그도 전사했다.

선조는 할 수 없어 이순신을 다시 불러 조선수군통제사로 삼았으나 수군은 끝이 났다고 생각하여 수군 해체령을 내리고 육군으로 발령했다.

[이충무공 행록]은 이때 이순신이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으니 사력을 다해 싸우면 적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습니다. 설령 전선 수가 적더라도 미천한 신이 살아 있으니 감히 모멸하지 못 할 것입니다라고 장계했다고 전한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이번에는 류성룡 제거작전이 전개되어 파직에 이르게 한다. 파직 당한 날에 이순신은 선조 311119일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날이다.

이렇게 이순신의 전사와 함께 7년 전쟁은 사실상 종결 되었다. 당연히 전공자의 포상이 이뤄져야 하는데, 선조는 재위 32(1599) 22일 명나라 유정에게 우리나라가 보전된 것은 순전히 모두 대인의 공덕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임란극복이 명나라의 덕이라는 궤변을 만들어 냈다.

필요할 때 이용하다가 필요가 없어지면 버리는 무능한 군주가 한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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