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보다 자유? [경찰일보 문이주 기자}

문이주 기자

작성 2020.06.15 14:34 수정 2020.06.16 00:36

[경찰일보 문이주 기자] 조선시대의 음란한 여인의 대명사로 유감동과 어을우동을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다. 유감동이 살았던 세종시대와 어을우동이 살았던 성종시대는 비교적 태평성대였다.


유감동은 검한성(檢漢城) 유귀수의 딸로 명문 사대부의 규수로 무안 현감 최중기와 혼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무뢰배 김여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무뢰배 김여달이 살인범 기찰을 한답시고 유감동을 겁간했다.


조선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녀의 음행은 사실상 김여달의 성폭행 때문에 인생행로가 완전히 바뀌었다.

조선조에서는 절개를 잃은 것은 죽음과 마찬가지인데, 유감동은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했다.


남편 최중기는 신분이 높은 인물로 어릴 적 부모에 의해 강제로 혼인을 한 탓에 부부는 성년이 되어서도 사랑의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다.

유감동은 겁간 당한 것에 자신을 질책했으나 한낱 무뢰배인 김여달과 사대부가의 유감동은 남편 몰래 만나 정렬을 불태웠다.


밀애를 계속하다가 김여달은 무안에 오래 머물지 않고 한양으로 올라갔다. 유감동은 남편과 함께 있으면서도 김여달을 애타게 갈망하게 되었다.


유감동은 잠을 자다가도 무안에서 한양에 있는 김여달을 찾아갔다. 거침없는 유감동의 욕망은 김여달 한 사람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겁간을 당했다. 어차피 발각되면 죽을 목숨인데 무엇이 두려우랴유감동은 세상의 모든 남자들과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격을 파하는 것이고, 여성을 억압하는 제도에 반발하는 것이고, 신분의 벽을 허무는 일이었다.

그녀는 김여달이 무뢰배 짓을 하기위해 집을 비우면 다른 남자를 집안으로 끌어 들였다.


남자들은 사대부가의 부인이라고 하면 법에 저촉되기 때문에 가까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유감동은 스스로 창기라고 거짓말로 남자들을 유인 했다.

첫 번째로 수정장 장지, 다음으로 장지의 소개로 은장 이성, 안자장 최문수가 유감동의 치마폭에 휘감기고, 영의정을 지낸 정탁은 유감동을 첩으로 삼기까지 했다.

유감동은 정탁 한 사람에게 만족할 여인이 아니었다. 정탁의 조카 정효문을 끌어들여 품에 안았다.

유감동의 소문이 낭자하자, 탄식하고 3대 임금을 모신 영의정을 지냈던 정탁은 유감동을 쫓아냈다.


그녀는 창기 행세를 하면서 한양뿐 아니라 해주 등 경기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남자와 간음하면서 장안에 파다한 염문을 뿌렸다.

천민부터 영의정을 지낸 사람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남자들과 통간한 것이 대궐까지 퍼져 세종의 귀에까지 들어가 진상을 파헤쳤다.

어을우동은 조선 제9대 성종 때 승문원지사 박윤창의 딸로서 태강 현감 이동의 부인이 되었다.

이동은 왕실의 인척으로 어을우동을 사랑하는 것 보다 서책을 읽고 시회에 참석하는 등 일에 더욱 열중하고 밤에도 사랑에서 잠을 자곤 했다.

부유한 왕실의 인척인 이동은 집안의 그릇을 모두 은그릇으로 바꾸기 위해 은장을 불러서 일을 시켰다.

은장은 이동의 집에서 머물면서 은그릇을 만들었다.

어을우동이 내실에서 문틈으로 은장을 살펴보니 베잠방이를 걸치고 홑저고리의 앞섶을 헤치고 땀을 흘리면서 일하는 건장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을우동은 계집종의 옷을 입고 은장이 일하는 곳에 들어가 웃고 떠들어댔다. 그러자 이동의 종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결국 이동은 어을우동을 쫓아냈다.

어을우동의 종이 오종년이란 자를 어을우동의 집으로 들여 두 사람을 연결시켰다. 그들의 밀애는 오래가지 못했다.

어을우동은 여러 남자들과 간음하기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장안에 퍼졌다. 그녀의 허위와 위선으로 남자들을 닥치는대로 유혹하여 간음했다.

결국 음행을 벌인 사대부들은 파직 되거나 귀양을 가고, 어을우동은 가혹한 고문을 받아야 했고, 대신들은 사형을 반대했으나 성종은 세종과 달리 교수형을 내렸다.

유감동과 어을우동은 자신의 육체를 내던져 양반들을 성의 노예로 전락시키고 조선의 잘못된 인습과 신분제도의 모순에 저항했다는 것이다.

로마 황제 클라우디스의 후처인 메사리나는 남편이 늙고 병들어서 황제 한 사람만으로 만족 할 수 없어 황실 주변의 남자들과 정사를 벌였다.

중국의 측천무후도 3천명의 남자 첩을 거느렸다는 기록이 있다.

'쾌락의 맛은 짧고도 고통스러운 것'이며 '애욕과 환락의 삶은 결코 삶의 진정한 보람과 즐거움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Copyrights ⓒ 경찰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문이주기자 뉴스보기